제목: 죽은 믿음 vs 산 믿음
본문: 야고보서 2:14-17 오늘 본문은 야고보서 전체에서도 가장 뜨거운 논쟁이 계속되는 부분입니다. 바로, ‘믿음이냐? 행함이냐?’ 의 문제입니다. 이 질문은 여전히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부분을 주고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공동체의 영적 리더를 뽑아야 한다면 여러분은 믿음 좋은 사람과 행실이 모범이 되는 사람 중에 누구를 뽑으시겠습니까? 다른 예로, 여러분이 은혜롭게 예배를 잘 드리고 나왔는데 평소 불편한 사람이 보여서 마주치기 싫어서 의도적으로 외면했다면 여러분 스스로는 이런 자신의 모습을 보며 어떻게 느끼시나요? 위의 예들처럼 믿음과 행함의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만은 않습니다. 믿음과 행함이 구원받는 것과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지도 기독교 역사상 아주 큰 질문이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구원에 이르기 위해 우리의 어떠한 행위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다른 종교와 우리 상식과는 굉장히 차별되는 복음의 독특한 특징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선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셔야 하는데,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롬1:17, 엡2:8-9) 사실 바울의 설명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창15:6) 바울 당시 유대교는 율법을 잘 지켜야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쳤는데, 사실 율법은 이미 구원받은(택함받은)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것이기에 구원 자체와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십자가 사건 이후에 율법의 행위는 무효화되었고, 그 이후에는 율법의 정신(하나님 사랑 & 이웃 사랑)만 요구됩니다. 바울은 잘못된 가르침을 바로잡기 위해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14절에서 ‘믿음이 있어도 행함이 없으면 그 믿음이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반문합니다. 얼핏 들으면 바울의 주장과 정 반대로 들립니다. 하지만, 이 둘은 상호 보완적입니다. 바울이 말한 행위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것’입니다. 그래야 구원받는다고 유대인들이 잘못 가르친 행위를 가리킵니다. 야고보가 말한 행위는, 좋은 믿음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행함입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사해서 나오는 착한 행실입니다. 바울조차도, 야고보가 말한 행함은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따라서 이전까지의 패러다임인 ‘믿음이냐 행함이냐’를 앞으로는 ‘산 믿음이냐 죽은 믿음이냐’로 바꿔야 합니다. 산 믿음에는 믿음과 행함이 모두 있습니다. 죽은 믿음에는 행함이 없습니다. (17) 그래서 그 믿음의 진위를 점검해봐야 합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이 자라려면 우리 믿음이 산 믿음이 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현 시대에 우리가 야고보서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구원의 은혜로 주시는 선물임을 강조하다 보니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책임감과 노력이 너무 소홀해진 경향이 현대 교회에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 다시금 복음에 집중합시다. 여러분은 이 복음을 듣는데 가슴이 떨리십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십자가의 결과를 아는 것, 그것을 인정하는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표현입니다. 그것은 내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음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나를 대신해서 처절하게 살이 찢기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차마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감격에 압도되는 것입니다. 그 죽음이 너무나 참혹해서 감히 요구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의 죽음이 너무나 필요해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격 속에서 그 은혜를 죄송하면서도 감격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을 진정으로 wholistic 하게 받아들이면 그 마음에 감격과 감동이 없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전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은 버리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내 삶을 이끌어 가시도록 나를 완전히 열어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을 따르는 자가 되기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나도 작은 예수가 되어 내 삶의 십자가를 지며 살아가기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산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이타적인 삶을 살아 내신 표본이십니다. 겸손과 순종을 완벽하게 이루시면서, 동시에 가장 능력있는 삶을 완성하신 분이십니다. 병자와 약자, 고아와 과부, 어린이와 여인, 세리와 죄인, 나병환자와 이방인들을 품어주시고, 모든 것을 가지신 분이 이 땅에서는 머리 둘 곳조차 없이 철저하게 무소유의 삶을 살아 내셨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를 가는 곳마다 베푸시고,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시며, 소망 없는 자에게 새소망을 주신 분이십니다. 나를 살리신 분이 이런 삶을 사셨기에 나도 이런 삶을 살겠노라 결단하는 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표현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죽은 믿음은 이런 감동이 메말라버린 믿음입니다. 그것은 복음을 wholistic 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논리 연산처럼 받아들였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는 너무나 감사하지만 그건 예수님의 몫이고, 나는 질 수 없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십자가 능력을 이해는 하나 예수님과 하나됨까지는 가지 않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에는 선한 행실이 따라 나올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을 부분적으로 취했기 때문입니다. 내 가치관은 전혀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갈 마음은 전혀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산 믿음은 한 마디로 예수님처럼 살기로 결심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 닮기로 결심한 사람 치고 선한 행실이 나오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반면, 죽은 믿음은 철저하게 자기 본위적인 믿음입니다. 내가 믿고 구원받았으면 끝이라는 잘못된 생각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믿음이 산 믿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날마다 새로워지기를 축복합니다. 삶의 가치기준이 예수님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내 삶과 성품이 예수님을 닮아 가기를 축복합니다. 우리 공동체에 산 믿음의 증거들이 날로 새로워지는 복된 공동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눔 질문 1. 산 믿음과 죽은 믿음의 기준을 ‘예수님 중심’과 ‘자기 중심’으로 볼 때, 내 믿음은 어느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시나요? 2. 최근 예수님과 십자가를 생각하면서 감격하거나 눈물을 흘린 경우가 있나요? 내 상태에 대해 나눠보세요. 3. 예수님과의 뜨거운 만남을 원하지만 잘 모르겠고, 경험도 없어 막막하신 분들은 목장에서 함께 기도해 주세요. 혹시 목사님과의 일대일 만남을 원하시면 연락주시면 찾아가서 기도해 드리겠습니다. (512-300-5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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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산책
샬롬! 오늘 본문은 성경에 이름이 기록된 두 여인을 이야기 입니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기 위해, 숫자를 줄이기 위해 산파들에게 아이가 태어나면 아들은 죽이고 딸은 살리라는 명령을 합니다. 이에 이 여인들은 왕의 명령을 거부하는 이야기 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 첫째, 성경에 이름은 믿음을 증명합니다. 바로의 명령은 거부하기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로는 그 당시 신으로 숭상 받던 인물이고, 그의 말 한 마디면 사람도 죽일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브라와 부아는 하나님을 두려워 함으로 살아있는 권력에 반기를 듭니다. 그들의 믿음으로 따라 산파의 역할을 잘 수행했습니다. 산파는 아이가 태어나는 것을 돕고 낳은 아이를 살리는 역할이며, 또한 아이를 죽이면 살인죄 즉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이기에 여인들은 거부합니다. 세상의 권력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이에 바로는 두 여인을 불러 그들을 책망하지만 여인들은 지혜로운 대답으로 이 위기를 극복합니다. 세상은 이 두여인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이름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심으로 믿음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둘째,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이 여인들의 믿음의 행동을 통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번성과 더욱 강하게 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만드셨습니다. 이 여인들의 믿음을 통해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훈을 줍니다. 세상의 시선으로 바로와 이 여인들을 비교하면 여인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당시 여인들은 사람의 수에도 포함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최고의 권력자와 이방 민족의 여인, 신분적으로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하나님의 시선으로 보면 두 여인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바로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여인들의 이름은 기록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름을 남기고 싶어하고, 또 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삶을 통해 우리의 이름을 남겨야 합니다. 믿음을 굳게 붙잡고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귀한 이름을 남기길 소망하는 AKPC 청년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Amen! (나눔질문)
응답 찬양 – 모든 상황 속에서 모든 상황 속에서 주를 찬양할지라 주는 너의 큰상급 큰 도움이시라 주의 얼굴 구할때 주의 영을 부으사 크신 사랑 안에서 주를 보게 하소서 내 영혼이 확정되고 확정 되었사오니 믿음의 눈들어 주를 바라봅니다 내 영혼이 확정되고 확정 되었사오니 믿음의 눈들어 주를 바라봅니다 주를 찬양할 때 주의 나라 이미 임했네 주의 영원한 나라 보게 하소서
제목: 교회, 형제의 연합
본문: 시 133:1-3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샬롬~ 지난 시간동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깊은 은혜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감사드리고, 이 은혜가 말씀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공동체 전체에 아름답게 흘러 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시편 133편입니다. 3절밖에 안되지만 이 시편이 유명해진 까닭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라는 1절의 표현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 말씀을 교회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기초로 삼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큰 은혜의 말씀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편을 읽으면서 다윗이 말하는 ‘연합’과 ‘동거함’이 정말 무슨 의미였을 지 궁금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나 지금이나 이상적일 정도로 똘똘 뭉친 민족이 아니었지 않나 하는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도대체 무슨 연합을 머리 속에 그렸기에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웠을까요? 이 시의 표제어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기 위해서 높은 언덕을 올라야만 했습니다. 그 때 그의 시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성전에 모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마음 속으로 그려 본 것입니다. 대제사장, 제사장들, 레위인들, 성전지기들, 그리고 제사 드리러 오는 백성들…. 그들이 각자 하나님이 주신 권위와 책무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제사 드리고 공동체를 이루는 모습을 상상한 것입니다. 그 공동체에 주께서 찾아와 주시고 죄사함과 공동체를 새롭게 하시는 놀라운 복을 베푸신 모습도 그려본 것입니다. 그 모든 장면이 다윗에게는 너무 선하고 아름답게 느껴진 것입니다. 다윗이 이야기하는 연합은 예배 공동체의 연합입니다. 지금 시대는 그것이 교회입니다. 이들의 연합은 독특한 연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개인별 개성이 매우 강한데도 집단 의식도 또한 굉장히 강한 독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공동체에는 각각의 개성이 분명합니다. 이를 그림으로 비유한다면 마치 유화 물감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각각의 색깔은 분명히 존중되고 보존되는데, 묘하게 합쳐져서 하나의 멋을 내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연합의 비밀을 2-3절에서 설명합니다. 아론의 머리의 기름은 그를 대제사장으로 구별하여 세운 보배로운 기름이었습니다. 이 기름이 그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옷깃에 흘러내려왔습니다. 수염은 그의 경륜과 지혜를 의미하고, 그의 옷깃에 있는 석류와 금방울은 공동체, 즉 교회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론을 구별한 보배로운 기름이 그의 전 인격을 통해서 교회 전체에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다고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은 예나 지금이나 강우량이 굉장히 적은데도 불구하고 놀랍게 물이 많습니다. 그 수원지가 되는 곳이 헐몬의 이슬입니다. 실제 보면 놀라울 정도입니다. 건기에도 헐몬산에는 물이 매우 풍부합니다. 헐몬산은 이스라엘 전체 지형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곳에 내리는 이슬은 온전히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헐몬산에 이슬을 베푸셔서 강물을 만드셔서 온 땅을 적시도록 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자면 헐몬산은 리더를 상징합니다. 교회 공동체의 리더가 바로 헐몬산입니다. 그들이 먼저 은혜 가운데 충만히 젖으면, 그 은혜가 온 이스라엘의 땅을 적시듯 온 공동체에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 연합의 원리가 바로 이 짧은 시편에 기가 막히게 담겨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선한 것들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라는 점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라고 다윗은 외칩니다. 하나님은 그 공동체에 거하시고, 그 곳에서 복을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복을 받을지어다! 나 여호와가 내리는 복을 받을지어다!” 이것이 바로 교회요, 예배 공동체입니다. 예배 공동체인 우리가 복된 공동체인 까닭은 하나님이 복을 명하시기 때문입니다. 받을 복은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영생은 예수 믿고 죽어서 천국가는 영생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때부터 시작해서 죽은 후 하나님 품에 안겨서 연속적으로 이뤄지는 축복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영원한 사귐과 교제의 삶입니다. 그런 복을 예배하는 공동체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축복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딱 한가지만 노력하면 되는데, 그것이 ‘연합’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나와 다름을 받아들이는 마음, 나와 다른 색깔을 수용할 수 있는 자세가 너무 중요합니다. 이 연합의 핵심은 모든 색깔이 자기 색깔을 내고 있을 대 더 멋스럽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이 다 함께 있어야 더 멋있고 건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름을 수용하지 않는 것이 틀린 것입니다. 먼저 목회자와 리더들이 이를 본으로 보여야 합니다 (2-3절). 반대로, 목회자와 리더들의 색깔도 공동체가 수용해 주어야 더욱 성숙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본 모습을 사용하셔서 공동체를 축복하십니다. 우리 공동체가 막힌 담을 허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름을 뛰어넘어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는 축복의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나눔 질문 1. 나는 나와 다른 생각과 태도와 가치관을 갖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어떻게 보아왔습니까? 2. 나는 특별히 어떤 부류의 사람에 대해 부정적이었나요?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상처의 경험) 3. 오늘 말씀처럼 다름을 뛰어 넘을 마음의 결단이 되었나요? 혹시 아직 어려우신가요? 솔직히 나누어 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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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청년부 예배오후 2시 (청년부 예배실) Archives
May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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