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1절) 라는 말은, 사무엘 선지자를 떠났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원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람 곁에 머물며 잠잠히 하나님의 시간과 일하심을 경험하는 것인데, 그 자리에서 도망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우리의 현실이라는 말입니다. 이어지는 1절 말씀에 다윗의 현실이 비춰집니다. ‘내가’, ‘나’ 라는 말을 무려 네 번이나 반복하며, 하나님 중심에서 나 중심으로 변모한 다윗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던 그의 모습과 사뭇 다릅니다. 이 순간 다윗을 가장 힘들게 한 질문은 ‘Why Me?’ 하나님 왜 나 여야만 합니까?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작 나의 구원에 관해서는 같은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Why Me?: 하나님 왜 나 같은 ‘죄인 중에 괴수’를 택하셔서 구원의 감격을 누리게 하십니까? … 현실적인 다윗 앞에 요나단은 꽤 비현실적인 답을 합니다 (2절). 그의 대답으로부터, 사울과 요나단의 (왕과 왕세자의) 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밀접하며, 요나단이 당시 사울의 정책결정에 깊이 참여할 만큼 중요한 직위에 올라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3절). 죽음의 그림자가 눈 앞에 있음을 직시한 다윗은 더욱 요나단을 의지합니다. 그러나, 요나단의 길은 다윗의 길과 애초부터 달랐습니다 (삼상 26:25 & 삼상 18:4, 다윗에게 신발 만은 절대 벗어주지 않는 요나단). 이것이 이어지는 유대인의 식탁 문화를 통해 나타납니다. 당시 ‘월삭’을 지키며 매 월 첫 삼일동안 제사를 드리고, 함께 모여 식사를 하는 자리에 다윗은 왕의 사위임에도 식탁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제사’(예배)라는 형식을 빌어 거짓말을 합니다 (다윗의 현재 영적상태가 그만큼 무너져 있음). 그리고 11절에 요나단이 꽤를 내어 다윗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들로 가자 하고 두 사람이 들로 가니라”.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이 ‘들’ 이라는 말 앞에 정관사 “그”가 붙어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바 된 “그 들”이라는 말입니다. 다윗의 광야 인생이 정하신 바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 잠잠히 머무는 시간이 반드시 필요했다는 말입니다. 사무엘상 21-22장은 다윗의 광야 인생의 끝자락을 담아내고 있습니다.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체 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슬리는 모습입니다 (삼상 21:13). 또 다시 도망을 가 도착한 곳이 아둘람 굴입니다 (삼상 22). 그 곳에서 시편 34편을 써 내려가며 다윗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 34:8). 인생의 광야를 통과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오늘 인생의 “그 들”로 나아가실 때, 다윗과 같이 나와 죽음의 사이가 한 걸음 뿐인 곳,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향한 사랑과 우리의 현실의 그 간극을 십자가의 능력으로 살아내시기 바랍니다. 빈 들에서 하나님의 일하심과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인생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내 인생의 ‘그 빈 들’ 한 가운데에서 십자가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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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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