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할 때 늘 조심해야 하는 것이 사각지대를 잘 확인하는 것입니다. 사각지대는 사이드 미러에는 보이지 않는 지역을 의미하지요. 사각지대를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아찔했던 적이 몇 번 있었습니다. 사이드 미러만으로는 내 차의 주변 상황이 다 보이지 않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하는데도 귀찮아서 혹은 깜빡 잊고 확인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면 사각지대의 특징은 두가지로 요약되는 것 같습니다.
첫째, 이것이 존재함은 누구나 안다. 둘째, 아는 것만으로는 안되고 반드시 눈으로 확인을 해야 한다. 데이비드 플랫 목사님은 「래디컬」 이란 책에서 신앙 생활의 사각지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보지 못하지만 다른 사람에 눈에는 잘 보이고, 한시 바삐 파악해서 바로 잡아야 할 신앙 생활의 영역을 가리켜 사각지대라고 정의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 역사에 그 어떤 핑계로도 감출 수 없는 사각지대로 노예제도를 언급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자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같은 인간을 노예로 부리는 악행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주일에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일주일 내내 성경을 읽으면서도 정작 그리스도안에서 한 형제인 흑인 남성과 여성, 아이들을 어떻게 물건처럼 취급했는지, 그리고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어떻게 성경을 남용했는지, 심지어 크리스마스 때 그저 닭다리 하나를 더 얹어 주는 것으로 너그러운 그리스도인을 자처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플랫 목사님은 두렵다고 이야기 합니다. 선한 마음을 가지고 예배 드리고 성경공부를 아무리 열심히 해도 우리 안에서 영적이 사각지대가 생기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죄에 물든 인간의 본성이 사라지지 않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무시하고 싶은 것은 무시해 버리는 모습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남아 있고 심지어 자신의 모습안에도 있어서 아무런 의식 없이 악을 저지르고 있을 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솔직하게 이야기합니다. 지난 주간, 또 다시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사건이 노스캐롤라이나 샬롯에서 있었습니다. 지난 수백년간 그리스도인들이 알면서도 애써 무시했던 사각지대들이 지금까지도 남아 많은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피해를 준 쪽이나 피해를 받은 쪽이나 모두 이 사각지대의 피해자들입니다. 주님 눈에는 너무나 분명히 보이지만 우리가 잘 보지 못하고 무시하는 사각지대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여전히 이 세상에는 극심한 빈곤 상태에서 살다가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루 2달러 미만으로 하루를 버티는 사람의 숫자가 20억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날마다 2만 6천명의 아이들이 굶주림과 얼마든지 예방 가능한 가벼운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세계 선교를 입으로만 말하고 있는 동안 주님께서 보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날마다 생존의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복음서에서 발견되는 주님의 모습은 생존의 싸움을 하고 있는 그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저 말로만 복음을 전하지 않으셨으며 직접 그들을 찾아가 눈으로 확인하셨고, 그들을 안으셨으며 실제적으로 그들을 치료하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이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위로한 실제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할 것은 분명합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보고 있지 않은 사각지대가 존재함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는 데에 멈추지 말고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선교적 사명이 여기에서부터 구체화됩니다. 우리가 이 사각지대를 눈으로 확인할 때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님의 시선과 마음, 그리고 주님의 능력을 부어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시는 주님의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 허창도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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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예배가 끝나면 지난 여름 이후 우리 청년부에 새로 오신 새가족들을 환영하는 행사가 친교실에서 시작됩니다. 오늘 새가족 환영회를 위해서 새가족팀, 미디어팀, 행정팀 외 여러 청년들이 지난 몇 주간 정말 즐겁고 신나게 준비했습니다. 우리 청년들이 준비하는 과정을 보는 것 만으로도 저에게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섬기는 것은 힘든 일이라기 보다는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직접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새가족 환영회를 준비하는 것이 즐거운 이유가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새로운 ‘가족’을 맞이하는 기쁨과 기대입니다.
예전에는 교회에 새로 등록하시는 분들을 가리켜 ‘새교우’라는 표현을 더 많이 썼습니다. 교회에서 만난 새친구, 즉 새로운 믿음의 친구라는 뜻입니다. 요즘에는 새가족 뿐만 아니라 교회의 성도들이 서로를 가리킬 때에도 교우라는 말 대신 ‘가족’ 또는 ‘식구’라는 표현을 더 자주 쓰는 것 같습니다. 친구라는 단어도 정말 좋은 단어이지만, 저는 가족이라는 단어가 더 좋습니다. 그래서 저희 청년부도 예전에는 새가족을 섬기는 팀을 새교우부라고 했는데 몇 년 전부터는 새가족팀이라는 말로 바꿔 부르고 있습니다. 친구라 부르든 가족이라 부르든 사실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친구 만도 못한 가족이 있는 반면, 가족보다 가까운 친구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가족이라고 부른다 하더라도 정작 서로를 향하여 어색하고 불편한 감정이 훨씬 크다면 가족이란 표현이 오히려 민망하기만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가족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한 형제요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서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때문에 흘리신 보배로운 피 때문에 새롭게 탄생한 가족, 즉 영적으로 혈연 관계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친구와 가족이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친구는 내가 선택하지만 가족은 그냥 가족으로 태어납니다. 친구는 필요에 따라 안 만날 수 있지만, 가족은 끝까지 함께 하며 서로 돕고 보살핍니다. 경제 및 경영의 전문가인 어떤 유명인이 ‘비즈니스를 하는 사람이 필요한 네 가지 부류의 사람’이란 글을 썼답니다. 이런 사람을 친구로 가지고 있다면 당장 사업을 시작해도 된다는 것이지요. 첫째는 격려와 위로를 해 주는 사람, 둘째는 보고 배울 수 있는 사람, 셋째는 나의 부족한 면을 채워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넷째는 특정 분야를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친구로 두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한 목사님이 이 분의 글을 읽고 본인의 생각을 이렇게 쓰셨습니다. “예수님은 정반대의 의미로 친구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분은 지금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친구라고 말씀하셨고(눅10:36), 인생의 목표를 나의 성공을 위해 친구를 사용하는 것 대신 친구를 성공시키는 것에 두라고 하셨습니다(막10:43-44). 그리고 예수님은 그 분의 사역을 시작할 때 위의 네 부류의 사람을 찾지 않으시고,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을 부르셔서 성공시키셨습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가리켜 친구(요 15:15)라고 말씀하셨지만, 세상에서 말하는 친구와는 분명 다릅니다. 예수님에게 친구는, 그냥 친구가 아니라 가족 같은 친구였습니다. 우리 청년들을 바라 보는 저의 시선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저에게 가족 같은 친구이며 또한 친구 같은 가족입니다. 비록 실제 혈연관계는 아닐지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보혈로 맺어진 영적 혈연관계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새가족 여러분, 그리고 청년 여러분,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진실로 친구 같은 가족, 가족 같은 친구로 서로 섬기며 서로 사랑하고 서로 돕는 진실된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 허창도 전도사 |
Author
김상범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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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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