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여러 종류의 나이가 있습니다. 먼저는 생물학적 나이가 있습니다. 제가 74년생이니 올해 한국 나이로 마흔 셋입니다. 제가 벌써 사십대 중반을 향하여 가고 있다니 정말 실감이 나질 않네요. 또한 신체 나이가 있습니다. 열심히 몸관리를 하시는 분들은 신체 나이가 실제 나이보다 더 젊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 연령도 있습니다. 나이가 어려도 성숙한 사람이 있는 반면, 나이가 들어도 아직 철이 덜 든 사람도 있지요. 정신 연령은,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언어 나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미국에 와서 아직 영어가 익숙하지 않을 때는, 영어를 사용하는 동안은 제가 마치 어린 아이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었습니다. 말만 어린 아이 같은 것이 아니라 생각도 어린 아이처럼 하는 것만 같았습니다. 우리말을 쓸 때에는 어른인데, 영어를 쓸 때는 어린이가 되는 것입니다.
신앙에도 나이가 있습니다. 신앙의 나이는 실제 나이나 정신 연령과는 큰 관계가 없습니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성숙한 사람도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에는 어린 아이 같기만 합니다. 그러다가 교회생활을 통해 신앙적으로 점점 자라납니다. 신앙의 나이도 언어 나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성숙한 분들이 주로 사용하는 어휘는 감사, 은혜, 순종, 섬김, 사랑 등의 단어와 연관되어 있기 마련이고, 아직 신앙적으로 어린 분들은 그런 어휘들이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용하는 어휘를 보면 신앙의 나이가 어느 정도인지 대충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하기에 신앙의 나이를 짐작할 수 있는 보다 분명한 기준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의 여부인 것 같습니다. 심리학자 Erickson의 정체성 발달 이론에 의하면 청년기 때에 한 개인의 자아 정체성이 확립된다고 합니다. 신앙의 나이도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신앙적으로 어린 아이에서 자라나 청년의 때에 접어들게 되는 것을 알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갖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제가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Relationship Builder”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깨어지고 무너진 관계 조차 그리스도의 사랑안에서 다시 회복시키는, 관계 건축가들입니다. 관계에 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관계를 단지 소비하는 데에 머뭅니다. 특별히 인맥을 잘 쌓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만약 인맥이 그 사람의 이익을 위해서 의도적으로 관리되고 있는 것이라면 그 사람은 관계 소비자(Relationship Consumer)입니다. 우리들은 보통 관계 소비자에 머물다가 경우에 따라서는 관계 파괴자(Relationship Breaker)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저 나에게 편한 사람, 유익한 사람과만 사귀는 데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나에게 불편한 사람, 소외된 사람, 경계선 너머에 있는 사람들에게 찾아가 주님 처럼 낮아짐으로 그들을 존중하며 그들과의 관계를 세워가는 사람들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십자가를 세워 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진정한 관계가 맺어졌듯이 깨어진 관계 가운데 나아가 진정한 존중에서 비롯된 친밀함이 존재하는, 즉 건강한 수직과 수평이 만나는 관계의 십자가를 세움으로 세상 가운데 진정한 화평을 이루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과연 나 지신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관계들이 세워지고 회복되었는가를 생각할 때에 저는 참 많이 부끄럽습니다. 여전히 어린 아이에 머물면서 말로만 어른 흉내내는 것만 같아 주님 앞에서 죄송하기만 합니다. - 허창도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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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여러분에게 설교를 전하면서 감사한 것 중에 하나가 청년 여러분이 설교를 집중해서 잘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설교를 전하는 사람에게 회중이 설교를 잘 들어주는 것은 정말 큰 격려입니다. 회중의 눈이 반짝거리고 입술은 ‘아멘’이라고 화답하는 것의 가장 큰 유익은 말씀을 듣는 회중에게 있지만 설교자 역시 많은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데 회중 가운데에는 설교 중에 꾸벅꾸벅 조는 분도 종종 있습니다. 졸고 계신 분들을 보면 ‘내가 설교를 지루하게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듭니다. 그래서 좀 더 재미있게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지요. 그리고 이어서 드는 생각은, ‘그래도 참 감사하다’입니다. 이렇게 피곤한데 교회에 와서 예배 드리고 설교를 듣고 있으니, 생각해 보면 졸더라도 정말로 감사한 일입니다. 어떤 청년이 제게 와서 이렇게 말을 하더군요. “예배 시간에 자꾸 졸아서 죄송해요.” 그 청년에게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미안해 하지 않아도 된다고, 네가 얼마나 열심히 살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고. 이민 목회를 하시는 어떤 목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납니다. 보통 한국 이민자들이 많이 하시는 도너츠 가게나 세탁소, 식당 같은 사업들은 육체적으로 정말 고된 일입니다. 밤늦도록, 또는 새벽을 맞도록 열심히 일하시고 와서 예배를 드리면 안 졸래야 안 졸 수가 없다는 것이지요. 잠을 깨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손뼉치며 찬양하시고 어떻게든 설교에 집중하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눈이 감기고 고개가 숙여지는 모습을 보면서, 속상하기도 보다는 오히려 감사하고 은혜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 분들의 삶 가운데 예수님이 가장 소중하기 때문에, 비록 몸은 고단하고 어서 눕고 쉬고 싶지만 예배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모습이 바로 우리 이민 교회 성도분들의 모습입니다. 우리 청년들도 고단한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학교 공부에 아르바이트까지 하느라 몸과 마음이 다 지쳐있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새벽까지 논문, 시험 준비 등으로 밤을 새는 것이 일상인 이들에게 주말이라고 해서 마음 껏 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직장인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 입니다. 모든 직장인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지요. ‘학교 다닐 때가 좋았다.’ 그렇습니다. 돈 벌기 참 어렵습니다. 절대 거저 주는 법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기도하다 말고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0). 우리의 육신이 참으로 연약합니다. 마음으로는 더 잘하고 싶고 힘있게 주님을 섬기고 싶은데 뜻대로 되질 않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연약함을 잘 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 드리며 조금 졸더라도 주님께서는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열심히 사느라 수고했다며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매번 졸 수는 없으니 예배 시간에 안 조는 좋은 방법은 없을까요? 간단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육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토요일 밤에는 가능하면 일찍 자는 것입니다. 물론 직업이나 중요한 일 때문에 이마저도 힘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만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일찍 자는 것이 예배를 준비하는 좋은 자세인 것은 맞습니다. 사실 유대인의 시간 개념으로는 해가 떨어지는 밤부터 다음 날이 시작됩니다. 즉 토요일 밤은 이미 주일이라고 생각하시고, 우리의 몸과 마음이 예배에 합당하도록 경건하게 시간을 쓰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가능하면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더 상쾌한 몸과 마음으로 주일 예배를 준비한다면 더 은혜로운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 허창도 전도사 |
Author
김상범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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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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