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비누를 사용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한 때는 고급스러운 사치품이기도 하였다. 비누 등장으로 유럽인들의 수명이 20년이나 증가되었다는 보도가 있을 정도이다. 비누의 기원은 종교 행위의 산물이다. 고대에 제사를 드리면서 짐승을 불태워 바치고 그 기름과 그 나무의 재를 합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 잿물은 드디어 양잿물로 등장한다. 신앙의 현장에 청결은 필수 행위이다. 건강과 청결은 같은 선상에 있다 하겠다. 그 말의 뿌리도 공통적이다.사봉, 사분이다.(Soap. Savon. Sabun. ) 옷이 더러우면 빨래할 줄 알면서, 몸과 얼굴은 날마다 비누로 씻으면서-. 바이러스가 겁이 나서 무엇을 만질 때나 무엇을 먹기 전에 손은 엄청 잘 씻으면서-. 영혼의 건강을 위해서는?. 그리고 행복을 위해서는 ? 내 입은 얼마 더러울까? 내 귀는 얼마나 더러울까? 내 마음은 언제나 깨끗할까? 그것 가지고 여태 사용하고 사랑하였는데-. 그래도 탈나지않고 깨어지지 않고 내버리지 않았다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비누는 몸을 위하여, 눈물은 마음을 위하여”있다 한다. “비누로 몸을 씻어 보아라. 잿물로 몸을 닦아 보아라 너의 더러운 죄가 내 앞에서 사라질 것 같으느냐?”. 성경에서 단 한 번 나타나는 이 비누가 한 밤 중 숲 속 오두막 집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 같아라. 이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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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만 가진 독특한 기능 가운데 하나는 숫자를 만든다는 사실이다.
원시시대는 인간이 몸으로 22까지 셀 수 있었다한다. 그 이상 소유할 것도 없고 그러니 셀 필요도 없고 관심의 분야도 좁았다는 의미이다 주전 3000년 대에 이집트에서는 백 만 단위를 헤아릴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였다 한다. 인간의 삶이 풍요롭고 관심과 삶의 영역이 광대해질 수록 더 큰 숫자가 필요하게 된다. 현대는 디지털 시대이다. 사실 디지털은 “손가락”이란 뜻이지만 그것은 숫자 시스템이란 말이다. 건강도 수치로 증명한다. 정치,경제, 과학, 전쟁, 스포츠, 지능, 행복,심지어 미래 예측도 수치다. 그렇다면 신앙만은 숫자와 상관없을까?. 신령하다는 사실 때문에 은총과 임무를 숫자로 말하는 것을 무시하거나 거부해야하는가?. 특히 숫자 0의 등장은 지금까지의 “없음”에 대한 새로운 세계를 향한 창이 되었다. 그것은 “비어있음”을 의미하며 지금까지의 인간 시야의 한계, 인식의 한계, 존재의 한계를 깨뜨린 사건이다. 그 “비어있음”의 위치에 따르거나 다른 숫자에 덧붙여질 수록 10배씩 증가는 역활을 한다. 지금은 예사로운 인식이지만 가히 기적의 경지가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진리의 세계를 숫자로 표시한다. 100마리 양 가운데 1마리 잃은 양을 찾는다하시지 않는가. 아버지 품을 떠나 자기의 꿈을 찾아 나선 아들. 꿈은 커녕 재산과 몸을 망가친 채로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변함없이 아들로 대접한다. 100분의 1이든, 10분의 1이든 2분의 1이든 같은 얘기이다. 소홀히 여길 수 있고 무시할 수 있으며 무지에 대한 새로운 가치를 그렇게 가르치신 것이다. 아홉은 어디 있느냐?고 질문하신다. 병든 사람 10사람이 고침받았는데 1사람만 돌와왔을 때이다. 사실 9사람이 돌아와야하는 것이다. 1사람 쯤은 놓칠 수 있으나 예상 외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것은 지금 여기 나의 모습이 아닌가?. 고침받고 새로워진 감동의 9개를 잊고 사는 삶을 안타까워서 깨우쳐 주신 것이다. 괴롭고 힘들고 못마땅하며 원망스럽고 불행하다면 다른 것 때문이 아니다. 방향과 위치를 잃어버리고 어딘가 배회하고 있는 나의 아홉 때문은 아닌가? . 이것을 먼제 문제 삼을 것이 아닌가? 이승태 어렸을 적에 들은 숱한 동화의 끝은 똑같다.
“그래서 둘은 다시 만나서 행복하게 오래 오래 잘 살았단다”이다. 어떤 동화는 주인공이 다시 어디론가 떠나가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석양을 향하여 또 다른 상황을 만나려 뚜벅뚜벅 걸어간다. 카메라는그 “호보”의 꼬리에 촛점을 맞춘다. 현대는 말할 것도 없고 고대에서 부터 드라마는 인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원시 시대는 제사적 동작이며 신앙의 표현이다. 광대 놀이는 사회적 정의와 불의에 대하여 통쾌함과 저항을 대신한다. 거기서만은 상놈이 양반을 조롱할 수도 있다. 실제가 아닌 상황을 다른 존재를 통하여 실제보다 공간적으로 시간적으로 심리적으로 더 강력하게 행동한다. 그것은 권선징악을 통하여 인간 원형의 회복을 가르친다. 대체로 주인공(protagonist)은 선하며 조연(antagonist)은 악하게 행동한다. 그런데 주인공은 하필 조연에게 모함을 받거나 시련을 당한다. 시련 없는 주인공은 없다. 때로 그는 절규하며 통곡한다. 그러나 주인공은 끝까지 버티어낸다. 때로 명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막을 내린다. 드라마는 반전이 거듭될 수록 명작이다. 예술적 표현은 필수 요소가 된다. 성경은 한 편의 큰 드라마로 엮어져 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사랑과 믿음의 원작이다. 그 드라마의 무대에 내가 서 있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그 작가의 시나리오이다. 나는 바로 그 주인공이 되고 그 안타고니스트는 나의 실제 삶에서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치유와 자유를 분출해낸다. 오늘도 무대 한 켠에서 명작의 한 부분을 엮어가는 그대를 생각한다. 이승태 인간이 인간됨의 궁극적 핵심은 무엇일까?.
몸의 조직이나 기능과 윤리만으로 인간을 다른 생물체와 차별화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으로 가능할까?. 그것은 “거룩”이다. 그러나 일상 삶에서 그것은 무시되기 쉽다. 현실성이 그것을 짖밟아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거룩은 기도가 그 얼굴이기도 하다. 기도 없는 인간은 아직 인간이 아니며 기도 없는 종교는 이미 종교도 아니다. 지구 상 어떤 존재도 인간 이외에 예배의 의식을 보여주는 생물은 없다. 예배는 모든 관계의 뿌리이며 원형이다. 단지 어둠의 세력은 예배를 부정하는 본성이 있다. 그리고 반드시 대체 예배를 유혹한다. 예배 없이 참된 믿음도 없고 그 믿음 없이 참된 예배도 불가능하다. 인간에게는 아직 잠재된 믿음이 있고 숨겨진 예배가 있다. 언젠가는 발휘되는 때가 반드시 온다. 인간은 극단의 한계나 역부족의 상황에서 자신의 모태를 그리워하는 본성을 갖고 있다. 게으름같이 보이지만 일컬어 퇴행이라 한다. 그 상황에서 오히려 안식과 평온을 누리게 된다. 예배는 인간의 궁극적 귀소 본능의 행위이다. 인간에게 최고의 불행이 있다면 이 섬김을 거부하는 것이다. 인간은 숱한 섬김으로 행복하고 여러 섬김으로 성공한다. 이 모든 섬김의 원천이 절대자를 섬기는 예배이다. 예배는 인간의 최고의 행복이며 최고의 임무이다. 오늘도 예배로 치유와 자유를 누리는 그대를 생각하며-. 이승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