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 그것은 낚시로 고기 잡는 것이라 하겠다.
노력이 필요하지만 획득은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다. 실력이 필수이지만 수확은 그것과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 낚시에는 위치가 중요하다. 그것은 잡는 어종에 결정적이다. 그러나 수확량은 위치와 비례하지 않는다. 참치는 텍사스 갤버스톤에서 약 12시간을 벗어난 바다에서나 잡힌다고 한다. 시간이 중요하지만 수확은 반드시 투자 시간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같은 장소, 같은 시간, 같은 시설, 같은 사람이라도 그 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그 순간만이라도 그는 물 밑 고기의 상태와 심리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이다. 심지어 혼자라도 보이지 않는 그 존재와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러나 한 날의 실패에도 그 어떤 것도 탓하지 않으면 그는 인생의 묘미를 아는 까닭이다. 수단과 방법,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까지도 행복이요 투자한 모든 것이 아깝지 않다면 멋을 아는 낚시꾼이 아닐 수 없다. 낚시와 신앙은 같은 특성을 가진다.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것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이다. 옛날 그 믿음의 사람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하지 않는가. 그래서 신앙은 은혜의 다른 말이기도 하다. 낚시는 행복과 맥을 같이 한다. 내 마음대로 안되는 까닭이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하다면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다. 또 하나 내 영혼과 앞날을 낚시하는 사건이 있다. 마귀의 낚시가 바로 그 사실이다. 낚시꾼의 그 인내와 집중, 그리고 그 열성과 감성 그 이상일 수 있다. 비록 어떤 형편에 싸여있더라도 묵묵히 초릿대에 눈을 떼지 않고 오로지 한 톨의 작은 행복을 낚시하는 예수의 바로 그 연인를 생각한다. 이승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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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가히 호모 푸쿠스(homo fucus- 화장하는 인간)이다.
적군에게 접근할 때 노출을 막기 위하여 병사는 위장한다. 화장하는 것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미인이다. 불안한 그 왕은 점치는 사람을 만나면서 변장하고 가지 않는가. 배우에게 분장하는 것은 그의 연기에서 또 다른 언어이다. 외출할 때 치장은 그 날의 만남이나 역활에 있어서 하나의 예언이 되기도 한다. 마음이나 공간에 대한 치장도 인간만의 독특한 행동이다. 재앙을 피하기 위하여 옛날 출애굽 백성들은 집 문에 양의 피를 칠한다. 악조건에서 벗어나거나 야심찬 획득을 위해 진실을 감출 때 인간은 말이나 행동을 포장한다. 어떤 선물을 포장하는 것은 그 선물 만큼이나 애정과 존경이 담기기도한다. 포장은 물건이나 관계의 파손 방지를 위하여 취급 주의를 요구하는 싸인이기도 하다. 모든 생명체는 위험에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위장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하물며 인간이거늘-. 겉과 속을 달리할 줄 아는 유일한 동물이 바로 인간이다. 비록 더럽고 야비하고 잔인한 것도 그것을 승화시킬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그 때 그렇게 단장하는 것을 성숙한 인격이라 하기도 한다. 단장한다는 말은 "코스모스"가 어근이다. 그것은 여러가지의 뜻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존경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단장하는 것은 옷을 입는 것과 같은 뜻이다. 그리고 옷을 입는 것은 때로 "감동"이라는 말로도 쓰인다. 믿음의 신부는 그 날에 "빛나고 깨끗하고 햐얀 세마포 옷"을 입는다. 옷을 입는 것은 행복이며 선택이며 특권의 구체적인 행위이다. 오늘도 불행과 시련 속에서도 몸과 마음, 삶과 앞날을 단장하는 그 믿음의 신부를 생각한다. 이승태 자동차에는 두 개의 발판이 있다.
하나는 멈춤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전진을 위한 것이다. 멈춤은 닫힘 때문이고 전진은 열림 때문이다. 성경의 주요 인물들의 공통점은 멈춤과 전진의 기회를 놓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별하는 구체적인 신호는 닫힘과 열림이다. 성령은 전도자에게 한 곳의 길을 막으신다. 그리고 다른 한 곳의 문을 여신다. 사람의 마음에도 멈춤과 전진이 있다. 삶과 행복에는 두 개의 기회가 온다. 하나는 능동의 문이고 하나는 수동의 문이다. 우리의 믿음과 사랑 그리고 기도에도 두 개의 신호가 있다. 그것은 기다림과 그리움의 장치이다. 열림의 문이 더딜지라도 멈춤의 발을 떼면 안된다. 닫힘의 문에서 조급할지라도 전진의 발에 힘을 주면 안된다. 멈추어야 할 때와 전진해야 할 때를 구별하는 것은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열려야 닫을 수 있다. 그리고 닫혀야 열 수 있다. 그래야 오만하지 않고 비굴하지 않게 된다. 멈춤과 전진의 신호를 기다리는 벗을 생각하며, 이승태 어느 날 아침 그의 꿈이 산산이 깨어진다.
곧 바로 학업의 부푼 꿈으로 가슴은 뛴다. 혹은 다음 달 신부를 맞을 준비로 설레이고 있다. 그 날 갑자기 그들의 행복은 공중 분해된다. 수 만리 집 떠나 이름조차 낯선 나라에서 꽃다운 청춘은 그렇게 잊혀진 이름이 된다. 그것이 고국에 바치는 희생이라면 서럽지는 않다. 그것이 세계의 평화를 위하는 것이라면 억울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고귀한 피의 희생을 싸구려로 지워버린다면 그것은 너무나 잔인한 처사이다. 허공을 딛고 건설되는 명예나 나라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평화는 소원을 따라서 찾아오지 않는다. 엄청난 댓가를 지불해야하는 과정이 길고도 멀다. 강력한 힘으로 유지되는 것이 자유다. 그것이 인간의 역사이다. 이름 없는 병사의 살과 머리까락은 눈 덮힌 산야에 뿌려지고 70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 상처 남은 유골로 그의 고국으로 돌아온다. 그의 꿈은 벌써 그의 옛 동무들과 그리운 고향 언덕과 시냇가에 뛰놀고 있다. 그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국가의 임무이며 힘이다. 죽어 돌아오는 병사 는 영광스럽다. 그 앞에서 통치자도 고개를 숙인다.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 그러나 잘 죽어야한다. 나라와 죽음 앞에 담대한 벗들을 생각하며 이승태
어릴 적 이 맘때는 보리 타작과 모내기가 한창이기도 하다.
보리는 작년 늦 가을에 땅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차가운 얼음과 눈 바람 속에서 성장을 멈추기도 한다. 그리고 이제 그 대지를 떠나 먼 여행을 시작한다. 곧 이어 그 빈 자리는 시집 올 벼들을 위한 신방처럼 꾸며진다. 그리고 그 곳에서 작열하는 뙤약볕을 버티어 늦가을까지 버티어간다. 끝내 그 곳에서 잘리고 벗겨져 또 다른 여행을 이어간다. 보리는 땅을 만나야 살고 물 속에 있으면 죽는다. 벼는 물을 만나야 살고 마른 땅에서는 죽는다. 벼는 여성적이며 보리는 남성적이다. 물이 남성적이라면 땅은 여성적인가 싶다. 그 시절 보리 피리는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는다. 벼 줄기는 속이 차있다. 그러나 보리 줄기는 속이 비어 있는 까닭에 음악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정작 넘어지기 쉬운 것은 속이 비어있는 보리가 아니라 속이 차있는 벼가 아닌가. 보리는 매서운 겨울을 통과한다. 그 후에야 무더운 여름 양식이 된다. 벼는 늦 가을 끝까지 따가운 햇살을 먹고 무르익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따뜻한 겨울 양식이 된다. 다르지만 서로가 필요한 존재로 살아간다. 지난 추운 겨울 보리는 이 무더운 여름 밤의 희망이였다. 지금 이 무더운 여름 벼는 다가오는 혹한의 희망이다. 어두움 속에서 겨울 꿈을, 혹독한 아픔 속에서 여름 꿈을 품는 용감한 벗들을 생각하며, 이승태 벳새다 마을 들녁에서 5000명의 잔치가 베풀어진다.
도대체 누가 어떻게 그 많은 음식을 제공하는가?.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빚어낸 기적이 아닌가!. 그 임자를 제자들은 "우리에게"라고 말한다. 오직 한 사람만 "여기 한 아이" 의 것이라 전한다. 그러나 그 마저 그 아이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아람의 국방장관 나아만이 나병에 걸린다. 그의 아내에게는 어린 여종이 하나 있다. 그는 이웃 나라에서 잡혀온 소녀이다. 고국의 사람들을 포로로 잡아간 원수가 병든 것을 알 때 그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는가?. 자기 고향의 선지자를 떠올린다. 주인이 그를 만나면 나을 것을 확신한다. 고국의 강에서 7번 몸을 씻고 그는 낫는다. 그런데 아쉽다 . 책은 그 아이의 이름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이름을 몰라도 괜찮을 인물은 알려지고 알려질 만한 사람의 이름은 알려지지 않는 사실이 궁금하다. 믿음의 사람들은 새로운 감동을 경험한 곳에 새로운 이름을 남긴다. 창조자는 만물을 지으시고 인간은 그 생물에 이름을 붙인다. 창조자는 인간이 이름을 어떻게 부르나 귀를 기울이신다. 창조자는 오늘도 나를 보신다. 다른 사람이 나를 읽어주지 못하면 어떠랴?. 스쳐지나가버리면 어떠랴? 보상이 없으면 어떠랴? 그래도 너는 내 앞에서 꽃으로 있는 것을 어쩌랴. 꽃이여 내가 너 이름을 모르면 어떠랴?. 네 위치와 모양과 빛깔의 까닭을 모르면 어떠랴. 지금 내가 너를 간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그 이름을 모른다하여 네가 꽃이 아닌 것이 아닐진대. 내가 네게 이름을 붙여주면 될 것을. 오늘을 어제와 다른 이름으로 가꾸어가는 벗들을 생각하며 이승태
인류 역사는 끊임없이 전통과 혁신이라는 두 개의 궤도 위를 달리고 있다.
교회의 역사 또한 그것과 공통점이 있다. 전통과 혁신, 이 둘은 씨줄과 날줄이 되어 역사를 만들어간다. 역사를 읽으면 분통이 터진다. 어쩌구니 없다. 뒤집히고 그것은 또 뒤집힌다. 또 역사를 읽으면 상쾌하다. 비록 그것이 잠시라 하더라도 치유와 자유를 경험하게 한다. 역사를 읽으면 인생은 참으로 허무하다. 비참할 정도이다. 인생 무상을 실감한다. 그리고 역사를 읽으면 심지어 두렵기까지할 만큼 신비롭다. 비굴하고 야비하게 살 것도 아니고 거만하고 안하무인으로 살 것도 결코 아니다. 아무리 전통을 강조해도 인간은 혁신을 거듭한다. 오히려 신나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우리 지금의 미용 스타일, 의상이 그것을 입증해준다. 만일 지금도 상투 모양과 비녀 착용의 두 발, 치마 저고리나 바지 저고리 그리고 두루마기를 일상으로 착용한다면 그래도 전통적이라 할 수 있겠다. 무릎 위까지 올라가는 바지가 허용되지 않았던 것은 그렇게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변하지 않겠다고 몸부림을 쳐도 이미 우리는 혁신의 물결 속에 흐르고 있다. 아무리 혁신적, 개성적이라 하여도 여전히 전통적 그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고 있는 부분도 있다. 내가 확신이 있어도 바꿀 수 없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평안을 구해야하고, 내가 불가능하다고 여길지라도 바꾸어져야 할 것이라면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둘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해야 할 것이다. Reinhold Niebuhr의 기도이기도 하다. 왜 우리가 전통과 혁신을 모두 드라이브해야하는가? 그것은 삶의 현장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과제와 임무를 만나기 때문이다. 전통을 위하여 바쳐진 희생이 나 혁신을 위하여 바쳐진 희생은 엄청나다. 무엇인가가 포기되지 않는 희생이란 없다. 그러나 그 댓가를 통하여 우리들의 관계와 역활이 뛰어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 최근 바이러스는 무서울 만큼 우리의 많은 것을 바꾸어 놓고 있다. 바이러스는 감염된다. 그런데 바이러스 뿐이 아니다. 감정도 감염된다. 언어도 감염된다. 사상도 감염된다. 물론 행복도 감염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좋게 변화될 수도 있다. 상호 관계나 주어진 역활이나 믿음의 활동에서 지금 영역을 뛰어넘을 수 있겠다. 어제의 전통은 오늘에는 혁신이 되고 오늘의 혁신은 내일에 또 다른 전통이 된다. 성경의 주요 인물들의 특징은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언약의 말씀에서 그 초심을 지켜나가는 이야기 이다. 내가 고칠 수 없는 일이 있고 사람도 있다. 사람이라면 대체로 가까운 사람들이다. 가족일 수 있다. 어느 남편은 결혼 초부터 아내를 변화시키겠다고 작심하였다. 물론 긍정적이고 좋은 의미에서이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나도 바꾸어지지 않는다. 놀라운 사실은 아내도 똑같이 남편을 바꾸어 놓겠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차라리 바꾸어야 할 대상은 자신부터 먼저 바꾸어 놓겠다는 결단이 더 빨리 행복지지 않을까 싶다. 어떤 전통과 혁신은 다분히 그 근거가 인간적 냄새가 풍겨 날 때가 있다. 그러나 진정한 전통과 혁신은 언약의 말씀에 근거하고 인간은 그 도구가 될 때이다. 그것을 우리는 믿음이라 할 수 있다. 그 믿음은 냉엄할 수 있다. 부디 바라건대 전통과 혁신을 부여받을 때 당황하지 않고 치우치지 않고 어젖하게 통과할 수 있기를 다짐한다. 내 자신의 삶 속에서, 가정과 사회에서의 대인관계에서, 그리고 신앙의 사역에 그리한다면 더 멋진 앞날을 예언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새로운 전환과 도전적 상황을 통과하는 성도들을 생각하며 목사 이승태 흙이 거므스레 하고 부드럽고 촉촉하고 바람을 받아들일 틈이 있는 흙은 좋은 땅이다.
그 땅은 처음부터 그러하지는 않았다. 누군가의 땀과 꿈이 함께 작업한 현장이다. 그것은 씨앗이 준비되었을 때 이루어지는 현실이다. 밝고 부드러운 마음 밭은 행복을 놓치지 않는다. 자신을 향한 예언에 눈 밝고 귀 밝은 까닭이다. 굳어지고 더러워지고 가시 밭되기 쉽건만 얼굴보다 더 잘 씻고 가꾸어온 까닭이다. 그 밭에는 말씀이 반드시 인정을 받는다. 영혼이라는 진실 하나로 묶어진 그 무리의 밭에는 어떤 것으로도 그 숨은 재능과 꿈과 향기는 불을 찾는 나비같이 나타난다. "농자 천하지 대본" (農者 天下之 大本)은 농사하는 사람이 세상의 기본이라는 뜻이다. 예수는 생애 마지막에 하나님을 "농부"라 고 가르치신다. 농심(農心)은 하나님의 심장과 가장 가깝다 하겠다. 주여 긍휼을 쏟으소서. 온갖 밭들에게, 토양을 향해 쏟아지는 비와 햇살의 흡족함으로. 그 날을 사모하며 이승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