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 교회의 공예배에 대해 교훈한 바울은 이어서 성만찬에 대해 교훈합니다. 바울은 성만찬 문제에 있어서 고린도 교회를 칭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주의 만찬’을 ‘자기의 만찬’으로 변질시켰습니다. 초대 교회 당시, 성만찬은 애찬(love feast), 곧 교제의 식사와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주일 저녁에 각자 음식을 가지고 와서 애찬을 먼저 하고 성만찬을 거행했는데, 문제는 먼저 온 부자 성도들이 하루 일과를 끝내고 빈 손으로 늦게 참석하는 가난한 성도들을 기다리지 않고 자기들끼리 음식을 먼저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성도들이 도착했을 때쯤에는 부자 성도들은 이미 식사를 마치고 포도주까지 마셔서 취하기까지 했고, 먹을 음식이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행위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난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라고 책망합니다. 바울은 교린도 교회를 향해 성만찬에 대한 바른 교훈을 줍니다. 성만찬은 먼저 예수님의 몸과 피를 기념하는 자리입니다. 주님의 몸은 우리를 위한 몸이고, 주님의 피는 우리를 위한 새 언약의 피입니다. 또한, 성만찬은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은혜를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전하는(선언하는) 자리입니다. 그리하여,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으로 온전히 성만찬을 행해야 하고, 세상에서 복음의 빛을 비추는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해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3-24)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25)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26)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의례적으로, 습관적으로 성찬에 참여했던 저의 모습을 회개하오니 용서해주소서. 떡을 대하고 잔을 대할 때마다 나를 위한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기억하고 감사하게 하소서. 성만찬을 통해 우리 교회가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시고, 형편이 어려운 지체들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을 일으켜 주소서. 주님 오실 때까지, 나의 생명 다할 때까지 십자가 복음을 증거하는 주의 증인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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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공예배와 관련한 문제를 다룹니다. 그것은 여성도들이 사회적 분위기와 문화적 상황을 거스르는 복장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여성 혐오나 가부장적인 태도가 아닌, 남녀를 상호 존중하는 태도로 말씀합니다. 당시 공적 장소에서는 여자들이 천으로 머리를 가리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이런 사회문화적 배경 속에서, 바울은 여자들이 머리를 가리고 예배하는 것이 하나님과 남자와 여자의 질서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임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이고, 창조에 근거한 권위의 질서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질서는 세상의 주종 관계나 세속적 권력의 관계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남자에게서 여자가 난 것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나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남을 강조합니다. 남녀는 차이가 있지만 평등합니다. 그리고 주 안에서 남녀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동반 관계입니다. 성경이 보여주는 영적 질서는 남자와 여자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공예배의 복장에 대한 결론적 입장을 말씀합니다. 남녀는 창조와 영적 질서 안에서 상호 존중의 마음으로 예배에 참여하되, 모든 성도가 예배를 통해 영광받으실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 점에서 다른 사람의 차림이나 모습을 존중해야 하지만, 사회적 통념에서 지나치게 벗어난 복장이나 공동체에 부담과 불편을 주는 행동, 복장, 언행은 삼가야 합니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7)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11-12)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구별해 지으시고, 남녀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삶을 살게 하시는 창조의 섭리를 찬양합니다. 창조와 영적 질서, 주 안에서의 남녀의 평등을 소중히 여기게 하시고, 나의 행동, 복장, 언행이 공동체의 덕을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상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종합하여 결론을 내립니다. 바울은 이 문제 배후에 숨어 있는 영적 문제를 파헤침으로써 신앙인이 마땅히 가져야할 마음과 태도가 어떤 것인지를 밝히고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과 죄로부터 자유를 얻었기에 모든 것이 가능한 사람들이지만, 그것들이 다 유익하다거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기에 유익하지 않는 일을 하는 어리석은 태도를 버리고, 근본적으로 내 유익이 아니라 남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손해를 보더라도 더 많은 사람이 유익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바울은 양심을 문제 해결의 기준으로 제시하면서 묻지 말고 먹으라고 가르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잔치나 음식에 다 참여할 수 있지만, 아직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위해 우상 제물이라는 것을 알려준다면 그 음식을 먹어서는 안된다고 권면합니다. 고기가 문제가 아니라 그 사실을 알려준 사람의 양심을 위해서 입니다. 불신자와 함께하는 잔치에 참여하여 음식을 먹는 것은 문제가 없지만 그 모습 때문에 시험에 들 만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위해 금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문제의 결론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입니다. 무엇을 먹든지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상관이 없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한다면 단호히 금해야 합니다. 율법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지만, 자신의 자유를 다른 사람을 위해서 포기할 수 있는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내 유익을 구하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되게 하여 주소서 ”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유를 가르치면서도 모든 사람에게 종처럼 행동한 이유는 바로 세상 사람들을 구속하시는 그리스도의 역사가 자신을 통해 일어나기를 소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유대인 앞에서는 유대인으로, 이방인들 앞에서는 이방인의 삶을 통해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예수님을 영접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고,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삶을 달리기 선수와 격투기 선수에 빗대어 설명합니다. 자유와는 전혀 상관 없어 보이는 사람들입니다. 운동 선수들은 유한한 보상을 얻을 뿐임에도 최선을 하하여 모든 일에 절제하며 살아가는데, 영원한 상을 얻으려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들만큼 노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신의 것을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하루의 삶을 통해서 주님을 향한 믿음의 고백과 내 것을 내려놓음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섬길 수 있고, 주님의 주시는 진정한 지유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과 부활의 능력으로 하루의 삶을 살아가게 하시고, 하나님과 이웃을 섬김으로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여 주소서” 사도 바울은 복음 전파를 위해 택함을 받은 사도입니다. 예수님 생전에 직접 제자로 선택되지는 않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온 몸으로 경험하고 복음 전파의 사명자로 불려졌습니다. 복음의 일꾼이 된 모든 제자들도 그 사명을 고귀한 소명으로 알고 담당했지만 바울은 특히나 스스로를 자격없는 자로 여겼기에 구원만큼은 복음만큼은 전적인 하나님의 경영하심인 것을 몸소 실천하며 살았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여러가지 문제들이 바울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지만, 복음에 관해서만은 안타까움 정도가 아니라, 목숨을 다해 지켜내겠다 하는 헌신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13절: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5절: “…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절: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18절: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바울에게 상은 그리스도 그분 입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 그것 자체가 바울에게는 상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불의하고 완악한 죄에서 건져내어 주신 예수님이 계시니 사도로서 받을만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그가 복음을 전하는 특권에 대한 댓가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으로 만족한 정도의 삶이 아니라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바울의 인생에 최고의 상이라는 것입니다. 권리는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이지만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습니다. 특히 은혜와 사랑으로 운영되어야 하는 교회에서는 더욱 더 그렇습니다. 칭찬받기를 기대하는 신앙에 머무르기보다 서로의 권리를 더 인정해주고 서로의 필요를 더 섬겨주는 성숙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소망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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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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