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자유에 대해 말하면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사도의 권리)조차도 복음을 위해 기꺼이 제한하고 포기했음을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곧 자신의 사도 됨의 증거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 사도로서 수고하고 헌신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성도들은 바울의 사도 직을 의심(비판)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자신의 사도권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로서 그는 먹고 마실 권리(성도들에게 음식과 숙소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고, 다른 사도들처럼 아내를 동반하여 사역을 행할 권리가 있고, 교회의 후원을 받아 복음 전파 사역을 할 권리가 있습니다. 사람의 예로 보아도, 수고한 사람이(군인이나 농부나 목자나) 대가를 받는 것이 정당한 일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권리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교회로부터 생활비를 받는 대신 자비량 사역을 하며(천막 만드는 것을 생업으로 감당하며) 복음 사역에 헌신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당연한 권리조차 그리스도의 복음에 혹이라도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기꺼이 내려놓고 희생한 것입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1)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12)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복음 전파를 위해 혹이라도 걸림이 될까 염려하여 자신의 당연한 권리조차 내려놓고 희생한 사도 바울을 봅니다. 저도 가장 중요한 것을 위해,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의 권리를 내려놓을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위해 나를 내려놓음이 나의 참된 기쁨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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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우상의 제물(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에 대해 말씀합니다. 당시 고린도 도시에서 유통되는 고기는 대부분 이방 신전에서 희생제물로 바쳐진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를 ‘지식인가? 덕인가?’ 라는 특별한 관점으로 설명합니다.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웁니다. 누군가 지식을 획득했다고 생각하면 그는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지식을 얻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께 알려집니다. 우상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니며, 하나님은 한 분뿐이십니다. 사람들은 많은 신들과 주가 있다고 믿지만, 오직 한 하나님 곧 만물의 창조주 한 아버지가 계시고 한 주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창조주가 계실 뿐입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이런 지식을 가진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상의 제물을 인지하고 먹기에 그들의 양심은 약해지고 더러워집니다. 음식 자체는 중립적이지만, 음식을 먹는 우리의 자유는 자칫 믿음이 약한 자들을 실족하게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바른 지식을 가지고 자유롭게 음식을 먹을 수 있지만, 나의 지식이(나의 행동이)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에 담력을 주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하고 멸망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해서 죽으신 형제요 자매입니다. 우리가 형제나 자매에게 죄를 지어 그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바울은 음식이 내 형제나 자매를 실족하게 한다면, 자신은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고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형제 사랑을 위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기꺼이 제한하고 포기하겠다는 선언입니다. 사랑이 함께 하는 지식이어야 참된 지식입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1)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9) 오늘의 기도 “사랑의 주님, 주님을 알아갈수록 형제와 자매를 향한 저의 사랑도 깊어지게 하소서. 사랑이 없는 지식을 추구하지 않게 하소서. 형제와 자매를 위해 나의 자유와 권리를 내려 놓을 줄 아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결혼에 대한 자기 생각을 이야기합니다. 결론적으로는 가능하면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말씀입니다. 이 권면은 자칫 오해를 살 수 있지만, 바울의 서신서를 살펴보면 그가 결혼과 가정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자들에 대해 주님께 받은 계명이 없다고 말합니다. 결혼에 대해 주님이 말씀하지 않으신 이유는 명백합니다. 하나님이 결혼을 만드셨고 또한 결혼은 명백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독신을 권면한 이유는 환난이 임박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의 압제 속에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박해가 시작되라라 예견되었기에 가정을 이루면 또 다른 아픔이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결혼한 이들이 배우자의 비위를 맞추느라 신앙생활을 소홀히 할까 걱정했습니다. 또한 로마 박해로 인한 어려움을 가족이 겪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있습니다. 배우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마땅하지만 주님보다 우선시하면 그것이 곧 우상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결혼을 통해 관계의 우선순위가 뒤로 밀려날 수 있음을 염려했기 때문에, 오늘 본문의 촛점은 결혼을 하느냐 마느냐 보다는 주님을 섬기는 일에 소홀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에 최고의 우선 순위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가정안에서도 하나님을 우선할 때 주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길 수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적 원리입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점검하면서 하나님을 최고의 우선순위에 두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 무엇보다도 주님을 사랑하게 하시고, 삶의 우선 순위에 하나님을 둘 수 있는 믿음이 되게 하여 주소서”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다시 음행에 대한 주제를 이야기 합니다. 그 당시 고린도는 항구 도시였고, 많은 상인들과 사람들이 몰려 들었고 유흥업소들이 성행해, 쾌락과 음행으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세상으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바울은 다시 한번 음행에 대하여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음행은 부부 관계 외에 모든 성적인 범죄를 가리킵니다. 성경은 모든 성적인 죄악을 심각한 죄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 조차 ‘율법에 매이지 않는 자유자’다라는 생각에 분별력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자유는 참된 자유가 아니라 방종입니다. 자기 입장만 생각하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할 때 그것은 참된 자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실 때 하나님께 찬송과 영광을 돌리는 존재를 만드셨지만 타락으로 인해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구원해 주셨고, 관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쾌락과 자기 만족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의 몸을 드려야 합니다. 음행은 그리스도의 지체를 욕되게 하는 행위이며, 성전된 몸을 창녀처럼 만드는 죄악입니다. 바울은 구원 받은 성도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고 사실을 명시합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을 통해 모든 대가를 치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풍성한 자유를 누리고, 죄에서 벗어나 우리의 몸으로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가치관으로 인한 성적인 유혹에 빠지 않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과 부활의 능력을 의지하여 주님께 영광 돌리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교회는 믿음을 지키고 성장하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신앙 공동체이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그리스도 안에 성도 된 자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 존재하는 공동체 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그의 백성 삼아 주셨고 친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셨기 때문에, 우리 또한 서로에게 형제 자매가 되어서 믿음 안에 사랑과 은혜를 나누며 살아가게 됩니다.
교회가 이렇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할 때, 교회는 세상의 윤리와 가치 기준을 넘어서서 역사하고, 또 우리 성도들은, 세상에 있으되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다 라는 깨닫음을 얻게 됩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다툼’의 문제를 말하고 있는데, ‘다툼’을 통해서 믿음 안에 ‘성도란 무엇인가’하는 것를 되짚어 보게 합니다. 성도는 누구를 말하는 것입니까? 거룩한 주님의 백성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성도들의 존재 목적은, 함께 기도하고, 인내하며, 위로하고 관용을 베풀고, 용서하고, 서로를 도우며, 하나님의 선한 뜻을 함께 구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성도들을 향하여 바울은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1절) 하며 성도들 간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세상에 고발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라고 말하면서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7절) 하며 사랑으로 품어주지 못한 서로에게 이미 허물이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많은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큰 은혜를 체험한 자들도 있음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9절) 우리는 성도로 허물이 많고 부족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할 때 이러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 믿음의 백성이 됨을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은 결국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 때가 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 세상에 있는 우리는 여러가지 죄악과 싸우며 그 시간들을 통해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용서를 배우고 훈련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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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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