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교회, 형제의 연합
본문: 시 133:1-3 [다윗의 시 곧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1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2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 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샬롬~ 지난 시간동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깊은 은혜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교회에 감사드리고, 이 은혜가 말씀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공동체 전체에 아름답게 흘러 들어가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시편 133편입니다. 3절밖에 안되지만 이 시편이 유명해진 까닭은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라는 1절의 표현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교회에서 이 말씀을 교회가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기초로 삼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큰 은혜의 말씀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 시편을 읽으면서 다윗이 말하는 ‘연합’과 ‘동거함’이 정말 무슨 의미였을 지 궁금해졌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나 지금이나 이상적일 정도로 똘똘 뭉친 민족이 아니었지 않나 하는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도대체 무슨 연합을 머리 속에 그렸기에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웠을까요? 이 시의 표제어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이 시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로 다윗이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기 위해서 높은 언덕을 올라야만 했습니다. 그 때 그의 시적 상상력을 동원해서 성전에 모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마음 속으로 그려 본 것입니다. 대제사장, 제사장들, 레위인들, 성전지기들, 그리고 제사 드리러 오는 백성들…. 그들이 각자 하나님이 주신 권위와 책무에 따라서 자발적으로 순종하며 제사 드리고 공동체를 이루는 모습을 상상한 것입니다. 그 공동체에 주께서 찾아와 주시고 죄사함과 공동체를 새롭게 하시는 놀라운 복을 베푸신 모습도 그려본 것입니다. 그 모든 장면이 다윗에게는 너무 선하고 아름답게 느껴진 것입니다. 다윗이 이야기하는 연합은 예배 공동체의 연합입니다. 지금 시대는 그것이 교회입니다. 이들의 연합은 독특한 연합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개인별 개성이 매우 강한데도 집단 의식도 또한 굉장히 강한 독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공동체에는 각각의 개성이 분명합니다. 이를 그림으로 비유한다면 마치 유화 물감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각각의 색깔은 분명히 존중되고 보존되는데, 묘하게 합쳐져서 하나의 멋을 내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런 연합의 비밀을 2-3절에서 설명합니다. 아론의 머리의 기름은 그를 대제사장으로 구별하여 세운 보배로운 기름이었습니다. 이 기름이 그의 수염을 타고 흘러서 옷깃에 흘러내려왔습니다. 수염은 그의 경륜과 지혜를 의미하고, 그의 옷깃에 있는 석류와 금방울은 공동체, 즉 교회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아론을 구별한 보배로운 기름이 그의 전 인격을 통해서 교회 전체에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3절에 보면,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다고 노래합니다. 이스라엘은 예나 지금이나 강우량이 굉장히 적은데도 불구하고 놀랍게 물이 많습니다. 그 수원지가 되는 곳이 헐몬의 이슬입니다. 실제 보면 놀라울 정도입니다. 건기에도 헐몬산에는 물이 매우 풍부합니다. 헐몬산은 이스라엘 전체 지형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곳에 내리는 이슬은 온전히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헐몬산에 이슬을 베푸셔서 강물을 만드셔서 온 땅을 적시도록 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자면 헐몬산은 리더를 상징합니다. 교회 공동체의 리더가 바로 헐몬산입니다. 그들이 먼저 은혜 가운데 충만히 젖으면, 그 은혜가 온 이스라엘의 땅을 적시듯 온 공동체에 흘러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 연합의 원리가 바로 이 짧은 시편에 기가 막히게 담겨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모든 선한 것들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라는 점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라고 다윗은 외칩니다. 하나님은 그 공동체에 거하시고, 그 곳에서 복을 명령하십니다: “너희는 복을 받을지어다! 나 여호와가 내리는 복을 받을지어다!” 이것이 바로 교회요, 예배 공동체입니다. 예배 공동체인 우리가 복된 공동체인 까닭은 하나님이 복을 명하시기 때문입니다. 받을 복은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영생은 예수 믿고 죽어서 천국가는 영생이 아니라, 이 땅에서 살때부터 시작해서 죽은 후 하나님 품에 안겨서 연속적으로 이뤄지는 축복입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영원한 사귐과 교제의 삶입니다. 그런 복을 예배하는 공동체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런 축복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 딱 한가지만 노력하면 되는데, 그것이 ‘연합’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나와 다름을 받아들이는 마음, 나와 다른 색깔을 수용할 수 있는 자세가 너무 중요합니다. 이 연합의 핵심은 모든 색깔이 자기 색깔을 내고 있을 대 더 멋스럽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모습이 다 함께 있어야 더 멋있고 건강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는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다름을 수용하지 않는 것이 틀린 것입니다. 먼저 목회자와 리더들이 이를 본으로 보여야 합니다 (2-3절). 반대로, 목회자와 리더들의 색깔도 공동체가 수용해 주어야 더욱 성숙한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본 모습을 사용하셔서 공동체를 축복하십니다. 우리 공동체가 막힌 담을 허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름을 뛰어넘어 아름다운 연합을 이루는 축복의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나눔 질문 1. 나는 나와 다른 생각과 태도와 가치관을 갖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어떻게 보아왔습니까? 2. 나는 특별히 어떤 부류의 사람에 대해 부정적이었나요?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상처의 경험) 3. 오늘 말씀처럼 다름을 뛰어 넘을 마음의 결단이 되었나요? 혹시 아직 어려우신가요? 솔직히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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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롬!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비판에 대하여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탕자의 비유로 많이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이 비유에는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버지, 맏아들, 둘째아들입니다. 오늘 말씀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둘째 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아버지에게 자신의 유산을 물려달라고 하는 아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아버지는 유산을 물려 주시만, 둘째는 그것을 가지고 먼 나라에서 흥청망청 낭비하여 궁핍하게 되고, 심지어 돼지를 치는 곳에서 일하고, 돼지가 먹는 열매를 먹고자 하는 상태까지 이르게 됩니다. 이에 둘째는 마음을 돌이켜 아버지의 집으로 향하게 됩니다. 둘째 아들이 의미하는 것을 세리와 죄인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하나님을 모르고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만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빈털터리 둘째가 돌아올 때 아버지는 먼저 알아보고 그에게 달려가 자신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하고, 그를 아무런 대가 없이 아들로 다시 받아주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두 번째 이야기는 맏아들과 아버지의 이야기 입니다. 동생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형은 잔치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화를 내며 거부합니다. 또한 아버지를 향해 자신의 마음을 못 알아 준다고 불평은 쏟아 놓습니다. 착한 아들로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했지만, 아버지와의 관계가 어긋나 있는 아들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맏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상징합니다. 종교적인 열심으로 살고,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지만, 여전히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맏아들에게 아버지는 먼저 나가서 사랑하는 아들이 잔치에 들어오도록 설득하십니다. 둘째 아들이나 맏아들에게 아버지는 자신이 사랑을 보여주십니다. 아버지는 바로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의 보혈의 희생을 통해 보여주신 예수님의 그 놀라운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결론이 없습니다. 맏아들이 잔치에 참여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십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이 베푸신 천국을 경험하는 AKPC 성도님들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Amen!
핵심 교리 68: 회개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자기 죄에 대한 진정한 슬픔(눅5:1-11), 자기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행 26:15-20), 지속적인 변화와 변혁을 이루는 삶(시 119:57-50)을 수반합니다. 하나님의 중생 사역에 대응되는 인간 행위, 즉 사람편에서 일어난 회심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들을 환영하고 그들과 식사를 했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의 비난에 예수님은 이야기로 응수하셨고, 하나님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죄인들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구주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친히 막대한 희생을 치르시며 죄인을 찾아 구원하시는 사역을 성취하십니다. (장년) 잃어버린 아들들에 향한 아버지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나요?
27그종의주인이불쌍히여겨놓아보내며그빚을탕감하여주었더니28그종이나가서 자기에게백데나리온빚진동료한사람을만나붙들어목을잡고이르되빚을갚으라하매29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그가빚을갚도록옥에가두거늘31그동료들이그것을보고몹시딱하게여겨주인에게 가서그일을다알리니32이에주인이그를불러다가말하되악한종아네가빌기에내가네빚을 전부탕감하여주었거늘33내가너를불쌍히여김과같이너도네동료를불쌍히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오늘 말씀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쉽지 않은 주제인데 이 시간을 통해서 우리가 형제를 어떻게 용서해야 할지 솔직하게 돌아보는 은혜의 시간 되시길 소망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고향인 가버나움에 가셔서 몇 가지 비유의 말씀을 가르치십니다. 주께서 형제가 죄를 범하면 교회가 치리해야 함을 말씀하시자, 베드로는 형제가 자신에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지 여쭙니다. 베드로는 당시 유대교의 용서의 기준인 세 번보다 많은 일곱 번 용서하면 되는지 물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뿐 아니라 듣는 우리에게는 굉장한 도전이 됩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무자비한 종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이 백 데나리온 (만 달란트의 60만분의 1) 빚진 자를 용서하지 않았던 비유의 말씀입니다. 여기서 주인은 하늘 아버지이시고, 만 달란트 탕감 받은 종은 죄사함을 받은 우리들이며, 백 데나리온 빚진 자는 우리에게 소소하게 잘못한 형제들입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 아버지는 우리를 악한 종과 같이 여기실 것이라는 굉장히 직설적이고 무서운 말씀입니다. 주님은 주기도문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의 죄사함을 받는 전제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의 죄사함의 권리도 포기해야 함을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용서하지 않는 마음은 내 죄는 이미 처리되었다는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알겠지만 우리 마음이 편치 않은 이유는 우리가 예수님 말씀처럼 용서할 자신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이 종은 왜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에게 이렇게 반응했을까요? 오늘 말씀 27-28절을 읽어보면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이 종이 큰 빛을 탕감 받은 후에 그 은혜에 감격하거나 감사하는 모습이 없다는 점입니다. 그도 사람이기에 탕감 받았을 당시는 크게 감격했을 겁니다. 그런데 그는 이 은혜 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특별한 감사 표현도 없이 바로 그 자리를 뜹니다. 바로 그 타이밍에 그는 자신에게 빚진 동료를 만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종이 차갑게 돌변한 것과 그가 감사하지 않은 것 사이에는 깊은 연관성이 있는 것입니다. 저희 첫째는 굉장히 빠른 아이입니다. 얘가 3학년때 가족이 제주도 여행을 갔습니다. 저와 아내는 애들에게 좋은 경험을 해주고 싶어서 여러 곳을 데리고 갔는데, 첫째아이는 그곳을 즐기기보다는 그 다음에 어디 갈지가 더 중요해 보였습니다. 계속해서 제게, “아빠, 우리 다음에 어디가?”를 물었습니다. 이것이 반복되자 점점 제 마음이 지쳐갔습니다. “왜 우리 딸은 지금 좋은 것을 주었는데도, 다음 것 생각하느라 좋은 것을 즐기지 못할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중에 깨닫게 된 사실은 제게도 그런 모습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오랜 시간 기도한 문제를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는데, 그 은혜에 깊이 머물기보단 그 다음 스텝으로 빠르게 전환하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했습니다. 이러면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머물기 힘듭니다. 우리는 받은 은혜를 깊이 묵상하지 않습니다. 마치 오래전부터 갖고 있는 것처럼 당연히 여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이 종도 그랬지 않았을까요? 탕감 받은 것은 기쁘지만 끝난 일이고, 다음으로 나아가려니까 자신에게 진 빚을 받아야 겠다는 마음으로 변한 것 아닐까요? 우리 기독교인이 은혜를 잊으면 이런 모습이 됩니다. 여기서 용서의 비밀이 드러납니다. 용서는 율법이나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해서는 예수님 수준에 절대로 도달 못합니다. 용서는 주님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님께 한 질문은 세 번이든 일곱 번이든 여전히 용서가 율법과 의지 영역에 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횟수를 초월하는 말씀입니다. 이는 용서가 율법이 아니라 은혜의 영역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야. 용서는 은혜로만 할 수 있단다.” “너는 받은 은혜 가운데 깊이 머물고 있느냐?”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 우리가 예수 처음 믿고 받은 구원의 은혜를 평생 기억하고 감사해야 합니까? 그것이 우리가 받은 가장 큰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죄된 속성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 말씀조차,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나를 용서하지 않으실거야. 그러니 나는 용서해야만 해” 라고 율법적으로 해석하면 안됩니다. 용서는 그렇게 해서 되지도 않을뿐더러, 이런 해석에는 우리 아버지가 너무 무섭기만 한 분이십니다. 우리아버지어떤분이십니까?만달란트나되는빚을,그저그자가불쌍해서,아무조건 없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용서해 주신 분이십니다! 이게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신 바로 그 마음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반복해서, 우리가 알아 들을때까지 말씀하십니다. “내가 독생자를 너희에게 내어 준 것은, 죄로 인해 죽어가는 너희를 모른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너희를 용서한 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너희를 향한 나의 마음이다.” 그래서 용서는 사랑입니다. 용서는 긍휼이고, 용서는 인내입니다. 용서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걸 어떻게 우리가 의지로 따라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은혜 가운데 있어야만 용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형제 용서하시고 싶으십니까? 그렇다면 다시금 십자가의 은혜 가운데로 들어갑시다. 그 가운데 침잠합시다.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조차 용서의 진정한 본을 보이셨습니다. 이 은혜가 우리를 예수님 닮은 용서의 사람으로 만들어 갈 것입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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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il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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